왠만한 비는 그냥 맞는 나다. 아직 오지 않는 비를 기다리며 우산을 챙기는게 귀찮기도 하고, 그 덕분에 자주 맞다보니 비 맞는게 생각보다 괜찮은, 나쁘지 않은게 아니라 괜찮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다. 혼자 쓰는 우산도 익숙치 않은 내게, 비오는 날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은 낭만이라기 보단 애매함이었다. 이 쪽 손으로 드는게 맞나, 반대편 손으로 들어볼까. 팔짱을 껴야 하는 걸까. 어깨를 감싸야 하는건가. 습한데 너무 붙으면 불쾌하지 않을까.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우산을 접어도 좋을 공간이었다. 이제와 생각컨데 아마 비오는 날이면 날마다 그대는 젖었을 테고 추웠겠지. 그렇게 여름은 끝났고.
다시 찾아온 여름 날엔.
둘이 쓰기에 하나의 우산은 작다는 것과, 하지만 혼자쓰기엔 외로울 듯 크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 어깨를 우산 밖으로 내 놓으면 비로소 작지도 크지도 않은 우산이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덕분에 비오는 날이면 늘 적셔지던 어깨는 이제 내 것이었다. 하지만 춥지는 않았다. 불쾌하지도 않았다. 운좋게도 비맞는걸 좋아하는 나였으니까. 비오는날이, 그러니까 시원한 어깨와 따스한 옆구리가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대는 기억할까. 처음 만난 날 우리는 걸음걸이도 참 안맞았다. 자꾸 앞서게 되는 나는 20년이상 그래왔어서일까, 차마 걸음걸이를 늦출 생각은 못하고 고개와 허리를 돌려 뒤처진 그대를 바라보며 걸었었지. 하체는 앞을, 상체는 뒤를 향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오는날 그대를 젖게함은, 함께 걸을 때 멀찍이 앞서나간 것은.. 그대를 춥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대를 뒤처지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러지 않는 법을 몰라서였다. 그대는 내게 많은 '처음'이었고. 그대에게 나는 서투름이었겠지. 수 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그대는 속으로 꽤나 속상하고 화나고 답답했을거 같다. 어느 한 켠에서는, 대체 뭐지 하며 끝내 오해를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믿음이 있었다. 우산의 마법을, 깨달았다기 보단 어느 순간 이미 알고있었던 것 처럼. 어느 샌가 너무나 자연스레 발 맞춰 걷고있던 것 처럼. 끝내 나는 세상가장 당신스러운, 말 그대로 지혜로운 남자가 되어있을 거라는 것을.